"나 대신 예수님이" (복음을 세 글자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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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8

서론
오늘 우리 가운데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왜 나왔습니까? 복음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왜 예배자로 살아갑니까? 바로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처음 들어본 사람도 있지만 사실 교회에서는 ‘복음'이란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됩니다. 영어로는 ‘크리쉐'라고도 합니다. 그렇다 보니까 복음이라는 단어가 희석되고 본래의 의미와 능력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영어로는 gospel이라고 합니다.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헬라 시대에 헬라인들이나 로마인들은 황제의 등극이나 전쟁에서의 승리 소식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은 보통 ‘복음들'처럼 복수로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휘를 빌려쓰되, 그 속에 새로운 내용을 집어넣고 단수로만 사용했습니다.
복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구원의 복음' ‘천국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복음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렇다면 이 복음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거에요. 죄인이었고 비참하고 허무한 인생에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건져주셨다는 사실, 내가 받아야할 죽음을 나 대신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어주셨다는 거에요.
그럼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항목 중에 하나가 죄인이라는 부분입니다. “도대체 내가 도둑질을 했어, 사기를 쳤어,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나더러 죄인이래?”라는 반문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창세기를 보면서 자꾸만 아담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아담의 불순종,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하나님이 되기는 커녕 사단의 통치를 받게 되는 비참함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 나에게 아담의 죄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또 반문합니다. “아담이 누군데? 내가 아담을 보기를 했어, 아담이 나를 알기나 해. 왜 아담의 죄가 내게 죄가 되냐고..”
이 죄에 대한 부분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데는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관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화) 뿌리 뽑힌 나무나 500년된 고목나무 비유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죄의 영역은 기준 자체가 달라서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할 때 ‘사람 대 사람' 혹은 ‘내가 살고 있는 상식' 선에서의 죄를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죄는 상대적이에요.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낯선 남녀가 옆자리에만 앉아도 있을 수 없는 해괴한 일이었습니다. 또 여자가 출산을 못 해도 죄였고, 일부다처제 안에서 부인이 남편을 투기해도 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일부다처면 감옥에 갑니다. 시간에 따라 죄의 기준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동시대를 보겠습니다. 개개인의 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은 새치기를 죄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센스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모피 코트를 입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는 패션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공간, 동일한 시대에 살아도 사람마다 또 다른 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근본적으로 그 기준이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담이 행위를 죄라고 하고, 그 죄가 나에게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중에 하나가 “우리 안에 하나님을 거절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거절하고 사는 인생,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하려 하므로, 즉 인간이 자신 안에 내재하는 자원으로 자신의 삶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므로, 결국 인간은 자신의 내재의 자원에 스스로 갇히게 된 것입니다.
예화) 김세윤 박사는 복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의지하고 순종하게 되어있는데 (이것이 올바른 관계, 즉 성경적인 전문언어로 ‘의'임), 이것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원만한) 관계 (“의")가 갈등의 관계 (“불의")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 주장은 인간을 역설적으로 사단의 통치 아래로 전략하게 하고, 하나님이 원래 창조 때 부여하셨던 인간성을 상실하여 비인간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는 계속해서 이렇게 하나님을 거절하는 인생의 제한성은 곧 결핍성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원들의 결핍에서 모든 형태의 고난이 온다고 합니다.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이기 때문에 변화에 속박되어 있고, 그러기에 늙고, 쇠약해지고, 병들고, 죽는다고 합니다. 지혜와 능력이 부족해서 불안하고 모든 문제들 속에 빠집니다. 사랑이 부족하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안, 병고, 압제, 빈곤, 갈등, 죽음 등 모든 형태의 고난이 결국 인간의 유한성 곧 결핍성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고난은 죽음의 증상이라고 합니다. 실존의 모든 형태의 고난은 죽음의 증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정론과 이어질 수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우리에게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예화) C.S 루이스 “베이글 예화"
이 하나님 없는 비참한 인생, 허무한 인생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의 비유 아닙니까? 내 것으로 살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거에요. 내 인생에 내가 주인이 되면 만족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그러나 결국은 빈털털이가 되어서 돼지 쥐엄 열매조차도 먹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인생의 결론입니다.
이제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럼 정말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까? 모든 게 끝난게 맞죠. 그러나 그렇게 인생의 끝에서 둘째 아들은 누가복음 15:1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복음의 능력이 시작이 되는거에요.
아버지의 집에 가면 아들은 못되어도 품꾼으로만 있어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깁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절대 절망의 상황에서 절대 희망이 되어주시는 하나님께만 돌아가면 살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에요. 그래서 그 복음이 good news인 이유가 있어요. 바로 터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가장 낮은 곳에 떨어졌을 때 나를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Jesus becomes reality.” 나의 끝이 바로 예수의 시작인 것입니다.
예화) 이렇듯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끝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PPT* 아래 문장을 완성해보세요: “나의 끝, 예수의 시작" (카일아이들먼)
-----------때 예수님의 실재를 만났다.
말기 암으로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을 때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나서 집을 나갔을 때
아버지의 총을 손에 쥐고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를 드렸을 때.
이혼서류가 날아왔을 때
우울증이 참기 힘들 만큼 깊어졌을 때
30년 동안 청춘 바쳐 일했던 직장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쫓겨났을 때
가정을 되살릴 힘이나 포르노 중독을 이길 힘이 내게 없다는 걸 마침내 깨달았을 때
연인과 헤어졌을 때
내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
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
그 예수님은 나의 절망을 가져가시고 새로운 소망을 주십니다.
그 예수님은 나의 슬픔을 가져가시고 내게 새로운 기쁨을 주십니다.
그 예수님은 나의 수치와 죽음을 가져가시고 내게 영광과 생명을 주십니다.
이렇게 인생의 끝에서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거듭나는 것,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이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화) 제이디 그리어 “오직 복음" 위대한 교환
오늘이 내 성적의 80퍼센트가 결정되는 날인데 시험 준비를 까맣게 잊었다고 가정해보자. 교수가 서로 다른 세 가지 원자 동위원소를 밝히고 그것을 구분하는 전자기적 특성을 논술하라는 것을 시험 문제로 제시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도통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90분이 플러가고, 강당 앞에 있는 교수를 향해 걸어가서 낙제가 분명한 답안지를 내밀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무렇게나 의미 없는 말을 늘어놓은 답안지가 교수의 서류함에 들어가려는 순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학우가 나타나 답안지를 잡아채더니 내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대신 적어 넣었다. 그리고 자기 답안지에는 내 이름을 적었다.
얼마 후 성적이 나왔다. 나는 합격했고, 그는 낙제했다. 나는 그의 점수를 받았고, 그는 나의 점수를 받았다. 물론 대학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30년 동안 살면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보여주는 좋은 비유다. 그분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을 사셨고, 그분의 이름을 지우고 우리의 이름을 대신 적어 넣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당하셨다. 우리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은 일이 그분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분의 공로가 우리의 것이 되었고, 우리의 징벌이 그분의 것이 되었다. 신학자들은 이것은 “위대한 교환"이라고 일컫는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영어에 보면 “Christ died for us.” 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for”라는 원어를 보면 이것은 “대신"이라는 뜻이 있다. 다시 이야기하면 이것의 좀 더 정확한 뜻은 “Jesus died in our place”
또한 영어에 God demonstrates는 현재 시제이다. 이것이 바울의 시대에도 진리였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진리라는 말입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제가 사랑하는 목사님께서 제가 힘들 때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복음은 가장 낮은 곳에서 들려지는 하늘의 위로"
여러분, 이상하게도 복음은 가장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들려진대요. 왜일까요? 저와 여러분이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에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그것도 모텔이 없어서 말구유에 태어나실 정도로 우리를 위해 한없이 낮아지셨습니다.
내 인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아무도 나를 찾아와주지 않을 때 주님은 그곳이 얼마나 비참한 현장이든 상관없이 내가 있는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달려오십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를 도와주고 싶다. 너를 살리고 싶다. 내 손을 붙잡아라. 내 손을 붙잡아라.” 그분은 인격자이시기에 우리가 마음 안에 문고리를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문을 열 때 하나님은 달려오셔서 여러분을 안아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끝을 본의 아니게 마주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내 인생 살만하다며 내가 여전히 주인이 되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 내 뜻대로 살아도 인생 잘 되는데 나에게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기도할 때에, 하나님, 먼저 내 존재의 절망을 깨닫게 하시고, 내 존재의 죄를 보게 하시고, 내 존재의 결국이 고난뿐이고 죽음뿐인 것을 알게 하여주소서.
아무리 말로 설득하려하여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님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영혼을 터치하여주시옵소서. 회개의 영이 터지게 하여주옵소서.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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